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르사유 조약 (문단 편집) == 조약의 파기 == 1920년대 중반 바이마르 공화국은 그나마 미국이 제시한 도스 안덕에 루르도 돌려받고 경제가 살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대공황]]으로 인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다시 폭삭 주저앉아 버렸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배후중상설]]을 신봉하게 된 독일 국민의 불만을 등에 업고 [[나치당]]과 [[아돌프 히틀러]]가 부상하게 되었으며, 집권층의 오판에 따른 적절한 연정(+ 나치당의 힘을 총동원한 각지에서의 강경한 시위와 선거 유세)을 통해 기어이 집권에 성공했다. [[1933년]] 집권한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은 무효이니 독일은 배상금을 낼 필요가 없으며 재무장을 하겠다는 주장으로 독일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 결국 [[1935년]] 3월 16일 독일이 징병제 도입과 공군 확장을 골자로 한 재군비 선언과 함께 베르사유 조약을 공식으로 파기하고 [[영국]]이 이를 공인함으로써 완전히 사문화되었다. 영국의 외교적 삽질로 기록되는 [[영국-독일 해군조약]][* 1935년 영국과 독일의 해군 전력 비율을 100:35로 승인한 것을 외교적 승리라고 주장했지만 개전 전까지 35는커녕 20도 못 채웠다. [[아돌프 히틀러]]의 허세에 놀아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적어도 에리히 레더는 Z계획을 통해 해군력 확대를 간절히 원했다. 1939년 9월 개전 직후 레더가 한 이제 독일 해군은 멋있게 죽는일만 남았다고 한탄했다.][* 이로 인해 무솔리니는 영국이 스트레사 동맹을 파기했다고 여기고 히틀러와 연합한다.]과 폴란드를 주적으로 가정한 육군 기동훈련에도 영국 대사와 무관들이 참관했으며 이는 동맹국인 프랑스를 경악시켰다. 이에 이어 아예 1936년 3월 7일 히틀러는 국방군을 비무장지대였던 라인란트에 진주하며 베르사유 조약을 완전히 끝장내버린다. 이때 영국은 아예 프랑스에 독일의 라인란트 진주에 대해 무력 대응과 제재를 가하는것에 반대 의사를 전했으며 폴란드는 1934년 3월 2일부 발효된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과 라인란트는 본래 독일 땅이었다며 1921년 프랑스를 돕기로 규정한 방위협정의 대상이 아니라고 거부했다. 가장 큰 관계자였던 프랑스는 동맹국들의 통수와 독일 국방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강경 대응을 포기해버리고 만다. 한편, 히틀러의 의견에 영국과 프랑스는 그 동안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을 크게 자극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배상금을 깎아주는 유화책으로 진정시키려 했지만[* 미국 상원에서 통과되지는 않았지만 로잔 회의에서는 200억 마르크인 48억 달러까지 깎아주려고 했다.] 이 시점에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의 폐기를 선언한다. 특히 영국과 미국에서는 경제 파탄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이 공산화될 것을 심각하게 우려했다.[* 적어도 1차 대전 패전 이후 독일은 러시아 다음으로 공산화 될 가능성이 제일 높은 나라 중 하나였다. 스파르타쿠스단의 1월 봉기으로 한때 공산 정부가 세워지기도 했고 그 이후 공산당이 매 선거마다 10%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공산화는 면하긴 했지만 [[나치 독일|이미 늦었다.]] 독일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걱정한 공산화보다 더 끔찍한 [[나치즘]]으로 폭주를 시작하고 있었고 이 때는 이런 유화책을 실시할 시기가 아니었다. 결국 [[전간기|관대해야 할 때는 가혹하고]], 강경해야 할 때는 유약하기 짝이 없는 20년에 걸친 어리석은 외교로 마침내 결국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서 다시 전쟁이 발발한다. '''바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이다.'''[* 프랑스는 자신들이 한 행동에 독일의 보복이 두려워 [[마지노 선]]을 구축하지만, 정작 독일군은 마지노선과 벨기에 방어선 사이의 아르덴 숲으로 마지노선을 우회하였다. 그 과정에서 중립국이었던 베네룩스 3국으로 강력한 조공을 보내 프랑스군을 낚은 건 덤][* 사실 프랑스는 벨기에 방면에도 마지노 선을 그으려 했지만 벨기에가 반대해서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대신 벨기에에 요새를 지어주기로 했는데 그것이 [[에반-에마엘 요새]]다. 문제는 그 요새를 지은 회사 중에 하필 '''독일 회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전쟁 발발과 동시에 요새의 내부 구조는 독일군에 모두 제공되었고, 결국 전투 첫날 공수부대 '''85명'''의 습격으로 허무하게 점령당한다. 기록된 점령 시간은 30시간이지만, 사실상 공수부대의 성형작약탄에 의해 포탑과 벙커, 출구가 파괴된 요새에 수비 병력이 갇혀 있었던 것에 가깝다.]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가 점령되면서 베르사유 조약의 원본은 [[독일 국방군]]이 접수했고, 그 후 행방은 묘연하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이 프랑스에게 항복 문서를 작성했던 열차도 이때 나치 독일로 끌려가서 전쟁 말미에 박살이 나 버렸다. 박물관에 승전 기념으로 전시되어 있던 그 열차를 항복 조약을 서명한 그 장소로 끌고 가 똑같이 프랑스의 항복 조약을 받아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결국 어떻게 보면 2차 대전 발발을 위한 조건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형성되기 시작된 셈이 되었다. 만약 온건파 말대로 배상금 없이 자비를 베풀었다면 나치당 같은 급진주의 세력이 정권을 잡는 일은 없었을 거고, 강경파 말대로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완전히 작살내놓았다면 나치가 정권을 잡더라도 전쟁을 일으키지는 못했을 테지만,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태도를 취한 탓에 독일 민중의 반발심은 있는 대로 이끌어내면서도 전쟁 수행 능력까지 억제하지 못한 최악의 자충수가 되어 유럽은 다시금 6년간의 극심한 [[제2차 세계 대전|병화]]의 길에 빠져들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